까르발라 사건
Posted in 종교 on August 23rd, 2004Posted by semih
글쓴이 : 유흥태
661년 알리가 카리지파에 의해 피살된 후 이슬람 세계의 대부분 무슬림들은 시리아의 통치자였던 무아위야를 칼리파로 인정하였다. 반면에 순니 이슬람 원리주의는 무아위야를 비난했는데, 이는 그가 정통 4대 칼리파 당시의 칼리파 선출 방식을 세습 군주제로 변경시켰기 때문이다. 무아위야는 순니의 역사에서는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간주되고 있는 반면, 쉬아의 역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쉬아의 초대 이맘인 알리에게 대항했고, 알리의 장자인 쉬아 2대 이맘 하산을 박해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의 아들 야지드는 쉬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이맘인 3대 이맘 후세인을 박해했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후세인은 쉬아에서 “순교자들 중 순교자”(Sayyid al-Shuhadā’)로 간주되고 있는 인물이다. 쉬아의 전통에 의하면, 무아위야는 하산이 자신에게 복종하는 조건으로 자신이 죽으면 하산에게 칼리파직을 계승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무아위야는 이 약속을 어기고 하산을 독살하였으며, 680년 그의 아들인 야지드에게 칼리파직을 승계하였다.
위와 같은 이유로 쉬아는 무아위야를 비난했지만, 쉬아 이슬람에서 악의 상징이자 제1의 공적은 이맘 후사인을 살해하도록 명령한 그의 아들 야지드였다. 쉬아에서 선과 순교의 상징이었던 후사인은 671년 형인 하산의 뒤를 이어 이맘직을 계승하였다. 680년 칼리파가 된 야지드는 후사인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의 맹세(bay’a)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후사인은 성소였던 메카의 하람 사원으로 피신하였다. 후사인은 이곳에서 약 4달 동안 기거하였다. 메카에 있는 동안 그는 이라크 남부에 위치한 쿠파의 백성들로부터 많은 서신을 받았다. 그들은 후세인에게 야지드의 폭정에 대항할 반란의 지도자가 되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후사인과 그의 가족 그리고 측근들은 메카의 성소를 떠나 쿠파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메카를 떠나기 전 후세인은 그곳에 순례를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은 순교를 당할 지도 모르지만 야지드 정권의 불의와 폭정에 대항하기 위해 떠나야만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