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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005 글모음

카르발라 사건

Posted in 종교 on February 26th, 2005

Posted by yht0427

시아 이슬람이라는 종파가 발생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자 시아 이슬람의 최대 기념일인 아슈라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 바로 680년 1월(Muharram)에 카르발라에서 일어난 3대 이맘 후세인의 순교이다.

제4대 칼리프 이자 시아 이슬람의 1대 이맘 이었던 마호멧의 사위 알리는 661년 카와리지파에 의해 이라크 쿠파의 모스크에서 암살 당했다. 후에 그의 첫째 아들 하산이 이맘직을 계승하였으나 유약했던 하산은 곧 우마이야조를 건설한 무아위야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후에 암살 당한다.

무아위야는 칼리프직은 자신의 아들인 야지드에게 승계를 하고 죽게된다. 그 이후 칼리프직은 초기의 민주적 선출방식에서 벗어나 전제 왕권처럼 세습을 하게 된다. 쉬아에서 선과 정의의 상징이었던 후사인은 671년 형인 하산의 뒤를 이어 이맘직을 계승하였다. 680년 칼리파가 된 야지드는 후세인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의 맹세(bay’a)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후세인은 성소였던 메카의 하람 사원으로 피신하였다. 후사인은 이곳에서 약 4달 동안 기거하였다. 메카에 있는 동안 그는 이라크 남부에 위치한 쿠파의 백성들로부터 많은 서신을 받았다. 그들은 후세인에게 야지드의 폭정에 대항할 반란의 지도자가 되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후세인과 그의 가족 그리고 측근들은 메카를 떠나 쿠파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메카를 떠나기 전 후세인은 그곳에 순례를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은 순교를 당할 지도 모르지만 야지드 정권의 불의와 폭정에 대항하기 위해 떠나야만 한다고 말했다.

칼리파 야지드는 쿠파로부터 후세인에게 편지들이 전해졌다는 소문을 듣고, 먼저 쿠파의 쉬아 지도자들을 처형했으며, 군대를 파견하여 이라크 남부 유프라테스강 근처 카르발라에서 이맘 후세인과 추종자들을 포위하였다. 히즈라(이슬람력) 61년(680) 1월(Muharram) 야지드의 군대는 이맘 후세인과 추종자들을 사막에서 포위한 후 9일 동안 물의 공급을 차단하였다. 10일째 되던 날 이맘 후세인과 추종자들은 밤 예배를 마친 후 3만 여명의 야지드 군대에 의해 무참히 처형되었다.

거의 모든 남자들의 머리는 신체로부터 절단되었으며, 후세인의 여동생인 자이납 Zaynab을 포함한 여자들은 포로가 되었다. 후세인의 머리는 다마스커스의 야지드에게 보내졌다. 쉬아의 전통에 의하면, 야지드는 후세인이 다시는 꾸란을 낭송하지 못하도록 막대기로 그의 머리를 정신 없이 후려쳤다고 전해진다.

이슬람력으로 매년 1월(무하람달) 10일은 쉬아의 가장 성스러운 날인 아슈라(’Ashura) 기념일이며, 이 날 쉬아 무슬림들은 680년의 사건을 재현하고 후세인과 추종자들의 고통을 함께 공유하였다. 이맘 후세인의 참수된 몸체가 묻혀있는 카르발라는 쉬아 이슬람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이며, 매년 수 많은 쉬아 무슬림들이 순례를 하기 위해 방문하는 장소이다.

쉬아의 기원 (the roots of Shiism)

Posted in 종교 on February 26th, 2005

Posted by yht0427

시아 이슬람이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무함마드 사후인 632년의 역사적 상황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메카에서 메디나로 히즈라를 감행한 10년 후인 632년 무함마드의 죽음은 종교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기 상황을 초래하였다. 왜냐하면 무함마드는 이슬람 공동체의 종교적·정치적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어느 누구도 감히 실행할 수 없는 최후의 예언자(nab?)이자 신의 사자(ras?l)였다. 이러한 무함마드의 중요한 역할 때문에, 그의 죽음은 과연 이슬람 정치 체제가 카리스마적인 인물의 손실에도 불구하고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이슬람 정치 체제는 무함마드의 죽음 이후에도 존속하였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후 칼리파(계승자) 계승권을 둘러싼 투쟁은 궁극적으로 이슬람 세계를 순니와 쉬아로 양분하고 말았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이후 시아로 알려진 일부 무슬림들은 무함맛의 혈통인 알리가 이슬람 공동체의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집단의 이러한 믿음은 결국 시아 이슬람으로 알려진 조직체의 형성에 정치적 동기를 제공해 주었다.

시아 이슬람의 첫번째 이맘인 알리는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배운 이슬람의 정통 4대 칼리프중에 마지막 4대 칼리프이다. 알리는 어려서 부터 무함맛에 의해 키워졌으며, 무함맛의 사랑하는 딸 파티마의 남편이기도 하다.
알리는 어려서 부터 늘 무함맛과 함께 했으며, 무함맛의 모든 여정을 함께 하고 무함맛과 이슬람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버린 용감하고 지혜 있는 자이었다 라고 전해지고 있다.

무함맛도 종종 알리의 용맹함과 신실함을 칭찬하고 그에게 신뢰를 표현했다. 사람들은 무함맛의 생각을 가장 잘 이해하고 수행하는 알리가 무함맛 사후 그의 자리를 이을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함맛이 사후 그의 자리는 무함맛의 장인이자 오랜 친구인 아부 바크르에게 넘어갔고, 그 사실에 승복하지 못하고 알리를 진정한 이슬람의 지도자라고 여기며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엿다.

아 부 바크르는 2년의 칼리프직을 수행하고 죽었다. 그후에 칼리프의 등극은 역시 알리가 아닌 우마르였다. 하지만 우마르는 알리를 존중하고 그에게 조언을 얻으면서 정복사업을 펼쳐 가장 넓은 이슬람의 팽창을 이룩하였다. (이때 이란도 페르시아 왕국이 무너지고 이슬람으로 정복되었다)

10년의 치세후에 우마르가 죽고 나자 또다시 칼리프 직은 우스만에게 넘어갔다. 점점 알리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탐욕이 강했던 우마르는 이슬람으로 정복한 각 지역에 자신의 친척들을 책임자로 보내 친정체제를 구축해 갔다. 그 동안의 민주적이었던 이슬람 세계가 점점 우스만에 폭정에 그 의미를 잃어 가자 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폭동이 일어나고 우마르는 암살을 당하게 된다.

드디어 알리가 많은 사람들의 추대로 마지막 정통 칼리프직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당시 우스만의 지명으로 시리아 총독으로 있던 무아위야가 반란을 일으키고 칼리프에 대항을 하게 된다.
이 전쟁으로 인해 수천명의 무슬림들이 죽게 된다. 전세가 불리해진 무아위야는 알리측에 협상을 요구하고, 이일을 두고 알리의 추종자들은 두 갈래로 세력이 나뉘어 진다.

무슬림으로 끝까지 싸움을 주장하는 주전파와 알리를 포함한 코란의 명령대로 화해를 주장하는 협상파로 나뉘어 진다. 결국 무아위야와 협상을 하게 되고 끝까지 싸움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알리의 진영에서 떠나게 된다.

이들이 바로 이슬람 최초의 종파인 카리지(Kharijite)파이다. 이들은 이후 공공연히 알리의 암살을 노렸으며 실제로 이라크 쿠파의 한 모스크에서 기도하던 중 카리지파의 전사의 독 묻은 칼에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 후 시리아 총독이던 무아위야가 이슬람의 권력을 잡게 되고 스스로 칼리프라고 지칭하고 우마이야 조를 창설하게 된다.

그 이전까지 원로들의 추천과 선거로 정해지던 칼리프는 무아위야 이후로 한 가문에 의해 세습되기 시작하면서 초기 이슬람의 정신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무아위야가 죽은후 자신의 아들 야지드에게 칼리프 직을 물려주었다.

이때 까지도 사람들은 숨어서 알리를 추모하고 알리의 가문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크게 드러나게 활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리의 둘째 아들인 3대이맘 후세인이 카르발라에서 야지드의 대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 된 것을 전해들은 후 알리를 추종하는 세력들은 급속도로 모이기 시작하고 이것이 시아 이슬람의 태동이 되었다.

쉬아 이슬람이란?

Posted in 종교 on February 25th, 2005

Posted by yht0427

시아의 뜻은 시아 알리의 준말로써 알리를 쫓는 사람들의 뜻이다.

시아 이슬람에 관해 기술하기 위해서는 일부 소수 집단(자이드파와 이스마일파)-시아파안에서도 나누어 지는 소수파들은 곧 정리할 것이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시아 집단들이 교리와 사상으로 믿고 있는 12이맘파(또는 이마미파)에 관해 언급해야 한다.

시아 12이맘파의 추종자들은 정신적 지도자 겸 이맘인 12명의 순수하고 순결한 이맘(완전함, 무오류성을 가지고 있음)들을 믿고 있다. 이들 중 첫 번째 이맘은 무함마드의 조카(삼촌 아부 딸립의 아들)이자 사위인 알리이며, 맨 마지막 이맘은 9세기 이후 인간의 시각으로부터 사라져 아직도 은둔 중에 있는 무함마드 알-마흐디이다.

시아는 이 12번째 은둔 이맘이 이 세상의 종말에 메시아로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숨은 이맘에 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쓸 날이 있을 것이다…넘 흥미로운 부분이고..예수님 이야기까지 나오는…종말론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에 성공하여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한 이란은 전 세계 이슬람 국가들 중 시아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국가이다. 지금현재 이란인의 89%가 시아 이슬람을 믿고 있고 10%는 순니 이슬람을 믿고 있다. 이란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전체 세계 무슬림 중에 15%만이 시아 이슬람을 믿고 있다.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은 대다수의 국민이 시아 이슬람을 믿고 있다. 또한 이라크와 바레인에서도 시아 12이맘파가 비교적 우세를 점하고 있다. 이라크의 전체 인구 중 약 55%는 시아이며, 바레인 전체 인구 중 약 70%도 시아로 추정되고 있다.

시아 12이맘파가 비록 소수이지만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국가들도 있다. 수에즈 운하의 동부 지역, 주로 레바논 지역은 전체 인구의 약 1/3이 시아 12이맘파에 속하며, 사우디 아라비아의 전체 인구 중 약 6%도 시아 12이맘파에 속한다.

여행객들 은행에서는 환전 못합니다.

Posted in 여행정보 on February 22nd, 2005

Posted by semih

이란을 찾는 여행객들이 이제 은행에서는 환전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란 중앙은행으로부터 허가를 맡은 전문 환전소에서만 환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은행에서는 송금되어온 달러를 이란돈으로 환전해 주는 것 이외에 고객이 현찰로 달러를 가져왔을때 환전업무는 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행객들이 환전소를 쉽게 찾을 수 없어서 앞으로 달러 환전에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된다. 하지만 주요 관광지 근처에는 달러 환전소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어슈러의 기원

Posted in 사회이슈, 역사(History), 종교 on February 22nd, 2005

Posted by semih

이맘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10일간 애곡행진을 벌이는 쉬아 이슬람의 최대 종교절기인 어슈러는 그 기원이 지금으로부터 2000년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했던 고레스 대왕과 그의 뒤를 이어 짧게 다스렸던 그의 아들 캄비세스 이후에 다리우스가 집권하기 전까지 잠시 이란을 다스렸던 자가 있다. 그 사람이 죽었을 때에 페르시아 국민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10일간 애곡했다. 이 사건으로부터 어슈러 행사가 즉 10일간 애도의 행진을 하는 것이 기원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후세인을 애도하는 행사는 이란 중세의 사파비조때에 이란 전역으로 퍼지면서 공식적인 국민 절기가 되었다.
이란 이외의 다른 쉬아 이슬람 세계에서도 이 행사를 하는데, 이는 이란으로부터 수출되어 간 것이다.